충주 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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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충주 박씨는 고려 시대 검교신호위대장군 박신의 후손을 시조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고려 시대에 충주에서 개경으로 이주한 후, 조선 시대에는 대전 지역을 중심으로 세거지를 형성했다. 단종 폐위 이후 광주로 낙향한 박지흥의 후손들은 학문적 명성을 얻어 호남 학맥의 중심이 되었으며, 대제학과 영의정을 배출하며 기고박의 고장으로 불리기도 했다. 주요 인물로는 박이룡, 박순 등이 있으며, 2015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주택총조사에서 34,226명으로 조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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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박씨 - [성씨/가문]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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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주 박씨 정보 | |
기본 정보 | |
성씨 | 충주 박씨 |
한자 표기 | 忠州 朴氏 |
나라 | 한국 |
관향 | 충청북도 충주시 |
원시조 | 박혁거세(朴赫居世) |
시조 | 박영 (朴英) |
중시조 | 박효함, 박제함, 박충함, 박신함, 박인흥, 박의흥, 박예흥, 박지흥, 박신흥 등 |
집성촌 | 대전광역시 충청북도 청주시, 제천시, 영동군 충청남도 공주시, 논산시, 부여군, 홍성군 전북특별자치도 익산시, 군산시, 장수군 광주광역시 전라남도 나주시 경기도 용인시 경상북도 제천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개성시 |
인구 (2015년) | 34,226명 |
주요 인물 | 박상, 박우, 박순, 박용철, 박병배, 박현주, 박선규, 박종현 |
2. 역사
8세손 박광리(朴光理)의 묘소는 개성 동문 밖에 그대로 남아있다. 조선 개창기 9세손 박진(朴蓁)의 아들 박효함(朴孝諴)·박충함(朴忠諴)·박제함(朴悌諴)·박신함(朴信諴) 형제와 박소(朴蘇)의 아들 박인흥(朴仁興)·박의흥(朴義興)·박예흥(朴禮興)·박지흥(朴智興)·박신흥(朴信興) 형제는 대전 세거지에서 다시 벼슬길에 나갔다.
후손들은 대전을 시작으로 제천, 영동, 군산, 논산, 공주, 김천 등지로 퍼져 나갔다.[9]
2. 1. 시조 및 고려 시대
시조 '''박영'''(朴英)의 아들 2대 '''박신'''(朴臣)은 고려 때 검교신호위대장군(檢校神虎衛大將軍)을 지냈으며, 이 때 충주에서 살던 가족들이 고려 개경으로 모두 옮겨 왔다. 박신의 손자 박원숭(朴元崇)은 삼사의 우사(三司右使)를 역임하였고, 그의 아들 박득승(朴得升)은 첨의평리(僉議評理)를 지내며 가세를 일으켰다. 고려말 권신 임견미(林堅味)의 횡포를 탄핵했던 박영의 8세손 박광리(朴光理)는 개성소윤(開城少尹)을 지냈고 사복시(司僕寺)[8] 정(正-정3품)에 추증되었다.2. 2. 조선 초기: 대전 세거지 형성
시조 '''박영'''(朴英)의 아들 2대 '''박신'''(朴臣)이 고려 때 검교신호위대장군(檢校神虎衛大將軍)을 지냈으며, 이때 충주에서 살던 가족들이 고려 개경으로 모두 옮겨왔다. 그의 손자 박원숭(朴元崇)은 삼사의 우사(三司右使)를 역임하였고, 아들 박득승(朴得升)은 첨의평리(僉議評理)를 지내면서 가세를 일으켰다. 그 후 고려 말 권신 임견미(林堅味)의 횡포를 탄핵했던 영의 8세손 박광리(朴光理)는 개성소윤(開城少尹)을 지냈고 사복시(司僕寺)[8] 정(正-정3품)을 증직받았다.9세손인 그의 아들 박진(朴蓁)과 박소(朴蘇) 형제는 여말선초 왕조 교체기에 각각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을 거쳐 진해, 직산 감무(監務)와 은산군사(殷山郡事)를 역임하던 중, 역성 혁명(易姓革命)의 소용돌이를 피해 200여 년 간 살아왔던 개성을 떠났다. 남쪽으로 내려온 그들은 충청도 덕진현(현 대전광역시) 가장골에 은거해 이때부터 충주 박씨들은 대전 일대에 세거지를 이뤘다. 그들은 도동(道洞, 현 대전광역시 도마동)에 추원사(追遠祠)를 짓고 관조를 비롯한 이하 7세의 위패를 안치했다.
2. 3. 조선 중기: 호남 명문가로 성장
9세손 박진(朴蓁)과 박소(朴蘇) 형제는 여말선초 왕조 교체기에 사헌부감찰을 거쳐 진해, 직산 감무와 은산군사를 역임하던 중, 역성 혁명의 소용돌이를 피해 200여 년 간 살아왔던 개성을 떠났다. 남쪽으로 내려온 그들은 충청도 덕진현(현 대전광역시) 가장골에 은거해 이때부터 충주 박씨들은 대전 일대에 세거지를 이뤘다. 그들은 도동(道洞, 현 대전광역시 도마동)에 추원사(追遠祠)를 짓고 관조를 비롯한 이하 7세의 위패를 안치했다.[8]8세 개성소윤 박광리(朴光理)의 묘소는 개성 동문밖에 그대로 남아있고, 조선조 개창기인 9세손 참의공 박진(朴蓁)의 아들 사형제 박효함(朴孝諴), 박충함(朴忠諴), 박제함(朴悌諴), 박신함(朴信諴)과 9세손 판서공 박소(朴蘇)의 아들 오형제 박인흥(朴仁興), 박의흥(朴義興), 박예흥(朴禮興), 박지흥(朴智興), 박신흥(朴信興) 때는 대전 세거지에서 다시 벼슬길로 나갔다.
후손들은 대전을 시작으로, 제천, 영동, 군산, 논산, 공주, 김천 등으로 퍼져 나갔는데, 이들 중에서도 특히 단종 폐위 때 처가인 광주 송정리로 낙향한 판서공 박소(朴蘇)의 넷째 박지흥의 후손들이 특히 청렴하고 학문이 뛰어나 대제학, 영의정이 나왔다. 이들은 행주 기씨, 장흥 고씨와 함께 호남 학맥의 중심으로 성장했고, 그 결과 조선 시대에 광주를 기고박의 고장[9] 이란 별명으로 불렀다고 한다.
3. 주요 인물
충주 박씨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인물을 배출했다.
- 고려시대
이름 | 관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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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 | 부정(副正) |
박신 | 검교신호위(檢校神虎衛)대장군 |
박원숭 | 삼사우사(三司右使) |
박득승 | 첨의평리(僉議評理) |
박덕린 | 판원사(判院事) |
박지성 | 민부상서(民部尙書) |
박세량 | 도첨의사사(都僉議使司)지부사(知部事) |
박광리 | 중산대부(中散大夫), 민부의랑(民部議郞), 개성소윤(開城小尹) |
박진 |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진해·직산 감무(監務), 조선조에 병조참의(兵曹參議) 추증 |
박소 | 은산군사(殷山郡事), 조선조에 호조참의(戶曹參議) 추증, 이조판서(吏曺判書) 가증 |
- 조선시대
- 박효함(朴孝諴)은 서산 현수, 청주목사, 강릉대도호부사를 지냈고 청백리에 올랐다. 강릉공파의 파시조이다.
- 박원창(朴原昌)은 상주판관, 장악원 첨정을 지냈고, 1474년 최초의 충주 박씨 족보인 성화보를 편찬했다.
- 박이룡(朴以龍)은 1576년 문과에 급제, 임진왜란 때 의병 500명을 일으켜 김천, 안동 등에서 활약했다. 김천시 직지사 인근에 신도비와 묘역이 있다.
- 박금(朴嶔)은 1626년 병인 별시에 급제, 황해도 도사, 예조 정랑을 지냈다. 인조가 효자 정려와 사방 10리 땅을 상으로 내렸다. 정려는 익산시 용안면에 있다.
- 박동형(朴東亨)은 이인좌의 난 때 역적 박필현 부자를 고변해 3등 분무공신, 충원군에 봉해졌다.
- 박형무(朴衡武)는 1464년 갑신 별시 무과에 합격, 청풍군수, 제포첨절제사, 강릉도호부사, 충청도 병마절도사를 역임했다. 중종 반정으로 위기를 맞았으나 족친 가자를 유지했다.
- 박상(朴祥)은 1501년 식년시에 급제, 중종반정 직후 사가독서를 하고 사간원 헌납이 돼 반정공신 책정의 난맥상을 지적했다. 청백리였고 당대 문장가로서 서거정 이후 사가(四家)로 칭송된다. 이조판서에 추증돼 광주 월봉서원에 제향됐다.
- 박우(朴祐)는 1510년 식년문과에 급제, 성균관 사성, 승정원 좌승지, 강원도관찰사를 지냈다. 영의정에 추증됐다.
- 박순은 1553년 친시문과에 장원급제, 훈구공신에 맞서 조선 정치의 물줄기를 사림 쪽으로 이끌었다. 1579년 영의정에 올랐다.
3. 1. 고려 시대
충주 박씨는 고려시대에 여러 관직을 역임한 인물들을 배출했다.이름 | 관직 |
---|---|
박영 | 부정(副正) |
박신 | 검교신호위(檢校神虎衛)대장군 |
박원숭 | 삼사우사(三司右使) |
박득승 | 첨의평리(僉議評理) |
박덕린 | 판원사(判院事) |
박지성 | 민부상서(民部尙書) |
박세량 | 도첨의사사(都僉議使司)지부사(知部事) |
박광리 | 중산대부(中散大夫), 민부의랑(民部議郞), 개성소윤(開城小尹) |
박진 |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진해·직산 감무(監務), 조선조에 병조참의(兵曹參議) 추증 |
박소 | 은산군사(殷山郡事), 조선조에 호조참의(戶曹參議) 추증, 이조판서(吏曺判書) 가증 |
3. 2. 조선 시대
- '''박효함'''(朴孝諴)은 서산 현수 재임 시 순찰사 최윤덕과 보령에 해풍성을 쌓아 왜구를 막았다.[11][12][13] 청주목사와 강릉대도호부사를 지냈고 청백리에 올랐다. 세종 때 65세 이상 관원을 외직에 보내지 말라는 지적에도[14] 칠순에 강릉에 부임해 임지에서 사망했다. 강릉공파의 파시조이다.
- '''박원창'''(朴原昌)은 상주판관과 장악원[7] 첨정을 지냈고, 1474년 최초의 충주 박씨 족보인 성화보를 편찬했다.
- '''박원직'''(朴原直)은 사복시[8] 주부, 영동군 현감, 사헌부[15] 감찰을 역임했다.
- '''박도'''(朴壔)는 지례, 용안(현재 안동시) 감무, 사헌부 감찰, 안주시 목사를 역임했다.
- '''박지'''(朴址)는 현감을 지냈고 선무랑[16]이었다.
- '''박성건'''(朴成健)은 옥천군 군수, 영천시 부사, 제주도 목사를 지냈고,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 '''박성즙'''(朴成楫)은 중추부 첨지사를 지냈다.
- '''박이룡'''(朴以龍)은 1554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576년 문과에 급제했다. 이조좌랑을 거쳐 황해도 도사 재임 중 군복 비리 사건에 연루되어 파직되었으나, 1592년 임진왜란 때 황의장(黃義將)이라 칭하고 의병 500명을 일으켰다.[17] 김천, 안동, 선산, 성주 등에서 200여 회 전공을 세웠고, 특히 안동 지례 전투에서 승리 후 왜병 1500명을 창고에 가두고 불태웠다.[18] 1593년 하로[19] 부상고개에서 화살에 맞아 중상을 입었으나, 의병대장 한명윤, 강절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졌다. 같은 해 능성 현령으로 부임했으나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송시열은 박이룡이 문사를 좋아해 성병(聲病[20])으로 후학을 장려하는 단점이 있었다고 평가했다.[21] 그는 사재를 털어 영동군에 학당을 건립하는 등 후학 양성에 힘썼다. 이조 참의에 추증되었고, 김천시 직지사 인근에 신도비와 묘역이 있다. 비문은 정호가 지었다.
- '''박이봉'''(朴以鳳)은 사헌부 지평을 지냈다.
- '''박응립'''(朴應立)은 절충장군,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 '''박진영'''(朴震英)은 오위[22] 상호군을 역임했고, 우부승지 겸 경연참찬에 추증되었다.[23]
- '''박유중'''(朴惟重)은 의금부 도사, 중추부 동지사, 호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 '''박충함'''(朴忠諴)은 군기시[24] 정을 지냈으며, 후손 박동형의 공으로 호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참판공파의 파시조이다.
- '''박금'''(朴嶔)은 1613년 31세에 진사에 합격하고,[25] 1626년 병인 별시에 급제했으나 시험 문제 오류로 과거가 취소되었다. 이듬해 정묘 정시에 다시 급제했다. 45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황해도 도사,[26] 예조 정랑을 지냈는데, 부친 박대술이 노환으로 쓰러지자 간호를 위해 낙향했다. 그는 자신의 허벅지살을 도려내 피를 아버지 입에 흘려 넣었다고 한다. 인조가 효자 정려와 사방 10리 땅을 상으로 내렸다. 탈상 후 풍기 군수를 지냈다. 정려는 익산시 용안면에 있다.
- '''박신함'''(朴信諴)은 개천 군수, 사헌부 집의를 지냈다. 집의공파의 파시조이다.
- '''박량'''(朴良)은 사헌부 집의 박신함의 아들이다. 1462년 식년 초시에 합격해 홍문관 정자가 되었고, 1466년 병술 중시에 급제해 좌랑, 홍문관 교리를 역임했다.
- '''박성량'''(朴成樑)은 훈련원 정, 안주목사를 지냈다.
- '''박성장'''(朴成章)은 훈련원 첨정, 중추부 첨지사를 지냈다.
- '''박유검'''(朴惟儉)은 좌위 부호군을 거쳐 절충장군에 올랐다.
- '''박지표'''(朴之彪)는 승정원[27] 좌승지를 지냈다.
- '''박유동'''(朴惟棟)은 조선 중기 학자이다. 초시에 합격해 진사가 되었고 사직서 참봉이 되었으나 문과에 응시하지 않고 후진 양성에 힘썼다. 김장생의 문인으로, 송시열, 송준길과 교류했다. 주자학에 진력했으며 송계서원에 제향되었다.
- '''박수문'''(朴守文)은 용양위[22] 부호군 때 수리관개사업 공로로[28] 상호군 절충장군에 올랐다.
- '''박수근'''(朴守謹)은 1674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725년 을사 증광시에 병과로 급제했다. 이조좌랑, 사헌부 지평, 장령, 무안현감을 역임했다. 동생 박수인, 박수해, 박수원과 사로당을 지어 형제 모두 80세가 넘도록 책을 읽었다고 한다.
- '''박경'''(朴涇)은 중추부 동지사를 지냈다.
- '''박세화'''(朴世華)는 1679년 문과에 급제해 병조, 예조정랑, 찰방 등을 역임했다. 양아들 박동형이 이인좌의 일당 박필현 부자를 고변한 공으로 덕은군에 봉해졌고, 사후 예조판서에 추증되었다.
- '''박동형'''(朴東亨)은 이인좌의 난 때 상주로 숨어든 역적 박필현 부자를 고변해 3등 분무공신, 중추부 동지사에 제수되고 충원군에 봉해졌다.[30] 1733년 광양현감, 순천부사 등을 역임했다. 광양현감 재직 당시 전세 착오로 체포될 뻔했으나 공신 특권으로 유죄 조항[31] 덕에 넘어갔다. 문과 급제는 못해 벼슬은 거기서 그쳤으나 공조판서에 추증되고 영조가 예장[32]과 묘조[33]를 내렸다. 44세로 사망했고,[34] 아들 박완신도 아버지 공으로 대호군에 오르고 완흥군에 봉해졌다.[35]
- '''박종우'''(朴宗祐)는 1746년생으로, 1802년 임술 정시에 병과로 급제했다. 첨정을 지냈다.
- '''박제함'''(朴悌諴)은 1403년생으로, 조선 전기 무신이다. 제주판관, 서천현령(현 서산시), 서천군수(현 서천군), 회령도호부사 겸 절충장군, 호분위 대호군 겸 군기시 정을 지냈다. 차남 박형무의 공으로 병조참판 겸 의금부동지사에 추증되었다.[36] 제주공파의 파시조이다.
- '''박형문'''(朴衡文)은 박제함의 장남으로 1421년생이다. 1475년 을미 알성시에 장원급제했다. 육진어사, 부여현감, 사헌부 지평, 장령, 임천군수, 창원도호부사, 진주목사, 종부시[37] 정, 통례원[38] 좌통례를 지냈다. 은퇴 후 대전광역시 내동에 예정(芸亭)을 짓고 학생들에게 학문과 무예를 가르쳤다.[39]
- '''박형무'''(朴衡武)는 박제함의 차남으로 1440년생이다. 1464년 갑신 별시 무과에 합격하고, 1466년 병술 발영시[40]에 급제해 한 계급 올랐다.[41] 합격자는 4명뿐이었고 남이와 발영 무과 동기이다.[42] 청풍군수, 제포첨절제사와 강릉도호부사를 역임했고 북방 육진 방비를 맡았으며 충청도 병마절도사에 올랐다. 연산군 일기에 따르면 공손하고 말수와 웃음이 적으며 체격이 크고 궁술과 승마에 능했다.[41] 청풍군수 재직 시 전세 유용 혐의로 탄핵받았으나[43] 증거가 없어 넘어갔다. 제포첨절제사 때[44] 삼포 개항[45]으로 생긴 일본인 마을에 불이 나자 일본인들끼리 칼부림을 하는 것을 막았다. 대마도 관리 미우라 라에몬이 무허가 어업을 나간 일본 교포 11명 중 8명을 처분하고 3명을 추격 중이라며 대마도주의 서신을 제출하자, 조선 측도 이를 허락했다는 보고가 있다. 연산군 때 권세가 거창 신씨와 사돈을 맺었고, 단경왕후[47]와 인척이 되었다.[48] 중종 반정으로 위기를 맞았으나 족친 가자[49]를 유지했다.[50] 반정 공신들이 그의 자리와 재산을 탐냈으나 중종의 중전 단경왕후와 사돈지간이라 충청병마절도사[51]에 증직돼 단서철권[52]과 인각화상[53][54]의 영예가 주어졌다. 1512년 사망했다. 향년 73세.
- '''박사진'''(朴士振)은 조헌과 함께 700 의병이 되어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군에 맞서 금산전투에 참전해 순국했다. 정려가 남아있다.
- '''박홍우'''(朴弘祐)는 무과 급제 후 비변랑, 선전관, 은율현감을 역임했다. 1646년 공주진 대장으로 역적 유탁을 토벌해 1등 공훈으로 중추부 동지사에 올랐다.
- '''박주흠'''(朴周欽)은 공조참판을 지냈다.
- '''박해'''(朴海)는 1569년생으로, 1601년 신축 식년 초시에 붙어 생원이 되었고 예문관 검열로 공부했다. 1606년 병오 증광시에 병과로 급제해 예문관 대교가 되었고, 1608년 삭출되었다가 인조반정 후 예문관 대교로 재기용되었다.
- '''박사하'''(朴思遐)는 1617년생으로, 1644년 갑신 별시에 병과로 급제했다. 승문원[55] 부정자에 올랐고, 교리와 첨지사를 역임했다.
- '''박의흥'''(朴義興)은 병조참의에 추증되었다. 참의공파의 파시조이다.
- '''박지흥'''(朴智興)은 1411년생으로, 진사시 급제 후 고향에서 후학을 가르쳤다. 세조 때 공신 권람이 천거했으나, 세조의 왕위 찬탈에 반대해 은거했다. 56세에 서씨 부인을 재취로 얻어 광주 송정리로 이사갔다. 서씨에게서 정, 상, 우 3아들을 얻었고 이들이 모두 대성했다. 손자 박순의 공으로 병조참판 겸 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찬성공파의 파시조이다.
- '''박정'''(朴禎)은 박지흥의 장남으로 1467년생이다. 어린 나이에 생원시에 합격했고, 호남 사림에서 '뛰어난 도와 정묘한 문장, 정대한 성품으로 당대 사림의 사표'라 평가했다. 7살, 9살 터울 동생 박상과 박우를 가르쳐 대성케 했다. 그의 문하에서 홍문관 대제학과 3명의 장원급제자가 배출됐다. 3형제를 소동파의 삼소[56]에 견줘 동국삼박[57]이라 불렀다. 호남 선비들이 그를 백미[58]라 칭했고, 김종직도 '실로 나라의 그릇'이라 했지만 요절했다.[59]
- '''박상'''(朴祥)은 박지흥의 차남으로 1474년생이다. 1496년 생원시 합격 후 교서관[60] 정자가 되었고, 1501년 식년시[61]에 급제, 교서관 박사, 별제[62] 등을 역임했다. 1506년 전라도 도사[63]로 자원해 연산군의 총애를 믿고 횡포를 부리던 우부리[64]를 곤장으로 때려죽이고 금강산 정양사에 숨었다가 중종반정으로 돌아왔다. 반정 직후 사가독서를 하고 사간원 헌납이 돼 반정공신 책정의 난맥상을 지적했다. 왕실 종친 중용을 반대하고, 훈구공신들의 전횡을 탄핵하다 임금과 훈구파의 공분을 사 한산군수로 좌천됐으나, 사헌부의 항의로 종묘서 령, 소격서 령 등 한직을 받았다. 눌재는 모친 봉양을 핑계로 임피[65] 현감을 자청해 궁을 떠났다. 1511년 홍문관 수찬에 재기용돼 응교를 지냈다. 1515년 담양부사 재직 중 장경왕후가 죽자, 순창군수 김정과 폐서인된 단경왕후 복위를 상소했다가 중종과 정현왕후의 진노를 사 오림역[66]에 유배됐다. 이듬해 조광조와 사림파들이 중용되면서 유배가 풀려 의빈부 도사와 장악원 첨정 등을 역임하고, 순천부사가 되었으나 모친상으로 사직했다. 1519년 기묘사화는 피했지만 심정의 원한을 사 외직으로 쫓겨났다. 1526년까지 충주와 상주 목사를 지내며 사림파 후배들을 챙겼고, 김안국과 김세필의 여주 학당에 쌀 200석을 빌려 동문들에게 나눠주고 가을에 쌀을 실어 갚았다. 사복시 부정 등을 지냈으며 1526년 병술 중시에 장원급제했으나 훈구권신들의 눈밖에 나 승진하지 못하고 1527년 나주 목사가 되었다가 병으로 낙향했다. 청백리였고 당대 문장가로서 성현, 신광한, 황정욱과 함께 서거정 이후 사가(四家)로 칭송된다. 이조판서에 추증돼 광주 월봉서원에 제향됐다. 눌재는 훈구파와 사림파 교체기에 사림운동에 전력하고 그 성공을 도왔다. 단경왕후 신씨 복위에 관한 상소는 강상[67]을 바로잡은 충언이었다고 조광조가 칭찬했고,[68] 퇴계 이황도 '원우(元祐)의 완인'이라 극찬했다.[69]
- '''박우'''(朴祐)는 박지흥의 삼남으로 1476년생이다. 1507년 사마시에 장원급제, 진사가 되었고 1510년 식년문과에 급제했다. 예문관 검열로 등용돼 전적, 흥덕현감, 호조정랑, 홍문관 교리를 지냈다. 경연에서 '고금제왕들의 치란흥망에 관한 이유를 설파해 모두 감탄했다'는 기록이 있다. 시강원 필선, 직제학, 성균관 사성, 승정원 좌승지, 강원도관찰사를 지냈으나 청렴했다. 김안로와 허확, 허항, 정유택 등 훈구파들이 옥사를 일으키자 자진해서 남원부사로 나갔다. 허확이 전주부윤으로 부임했으나 정무 외에 비위를 맞추지 않았다. 권세가들과 얽히는 것이 싫어 벼슬을 내놓고 2년간 책만 읽었다. 도승지로 복직, 대사헌이 되었으나 허항이 2년 전 일로 모함해 공주목사로 좌천됐다가 파직됐다. 2년 후 병조참의로 복직되나 허항이 또 모함해 해주목사로 좌천됐다. 해주에서 선정을 베풀어 중종이 표리를 내려 포상했다. 성균관 대사성, 병조, 이조참의를 지냈다. 인종 때 한성좌윤 겸 춘추관 동지사로 중종실록을 감수하고, 명종 때 전주부윤을 역임했다. 청백리에 뽑혔고 아들 박순의 공으로 영의정에 추증됐다. 형 박상과 더불어 사림파로서 훈구공신들로부터 박대를 받았으나 소신을 굽히지 않고 사림의 길을 열었다.
- '''박개'''(朴漑)는 박우의 장남이자 박순의 형이다. 1511년 서울 태생. "자식으로서 배울 것은 효도만한 것이 없다. 곤궁할까 현달할까는 하늘에 달려 있고 효도는 나하기 나름인데, 하늘에 달려 있는 것은 내가 알 수 없는 것이고 나하기 달린 것은 내가 힘써야 한다"라는 말을 했다.[71] 사자소학 효행편[72]에서 배운 대로 행동하는 걸로 유명했다. 18세 때 과거를 보러 온 선비가 인파에 밟혀 죽은 것을 보고 과거를 포기했다. 광주 송정리에서 은둔생활을 하며 친족, 처족 중 굶는 이에게 먹을 것을 주고, 장례나 혼례를 치르지 못하는 이에게 비용을 댔다. 나룻배에서 거문고를 뜯다 읊은 시[73]가 선조에게까지 알려졌다. 임금이 어사를 보내 벼슬을 주려 했지만 거절했다. 선조가 경연관[75]이던 동생 박순을 불러 설득하라 명하자, 60세가 넘어 한성부 참군에 제수됐다.[76] 고산 현감, 통정대부, 김제 군수를 지내다 관직을 물리고 자연으로 돌아갔다. 1586년 76세에 세상을 떠나던 날 연파정으로 실려가 시 한 수[77]를 남기고 사망했다.
- '''박순'''은 박우의 차남으로, 1519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14세까지 부친에게 배우고, 15세에 서경덕에게 배웠다. 주리론(이이원론)을 기초로 한 정통 주자학과 퇴계 이황, 남명 조식에게도 사사받았다.[78] 1549년 대전광역시 문지동 시조묘 아래에 '사암'을 짓고 연구해 주위 성리학자들이 사암선생이라 했다. 1553년 친시문과에 장원급제 후, 왕의 사위가 밀수한 물목을 압수하고 훈구파 임백령의 공훈을 폄하해 궐문 밖으로 쫓겨나는 등, 훈구공신에 맞서 조선 정치의 물줄기를 사림 쪽으로 이끌었다. 1567년 예조참판, 1570년 예조판서, 홍문관 대제학에 올랐다. 명종 때 퇴계 이황에게 대제학 자리를 양보한 미담이 있다. 1572년 우의정, 1573년 좌의정, 1579년 영의정에 올랐다. 14년간 정승 자리에 재임하며 이이와 성혼을 두둔해 탄핵됐다. 율곡이 스승 백인걸을 '기고학황(氣高學荒)[79]'이라 말해 대다수 선비들이 등돌리게 만들었지만, 박순은 이이와 성혼을 두둔했다. 서화담과 퇴계의 문인이었던 박순이 서인으로 몰려 공격받는 것은 부당했지만, 원로 사림과 신진 사림 간의 대립으로 논란이 옮겨 붙자 스스로 하야했다. 조광조의 근본주의에 매료된 신진 사림들은 유교를 식자들의 이념에서 조선 백성 전체의 실천강령으로 만들기 위해 1세대 사림들과 입장을 달리했다. 애제자 정개청[80]의 변절도 이 때문이었다. 사림을 위해 싸웠던 그가 후배들에게 떠밀려 물러났지만 젊은 사림들의 뜻을 지켜줄 줄 알았다. 왕수인의 양명학을 배격하고 정통 주자학을 관철해 서인의 영수인 송시열과 송준길 등에게 존경[82]받고 사상과 작품이 사랑받을 수 있었다.[83]. (박순은 노장 사상에 개방적이었던 서화담의 문인이었기에 문묘에 배향되지 못했다.) 붕당 정치의 서막에 포천시 백운산에 배견와와 이양정을 짓고 향년 67세로 사망했다. 퇴계 이황은 '그는 한 덩이의 맑은 얼음과 같아서 그를 대하면 정신이 시원해진다'고 했다. 명종도 '송죽 같은 절조와 지조, 수월 같은 정신이 있다'고 평했다. 1572년 사은사로 북경에 가서 외국 사신들이 정문으로 드나들도록 주청해 개선했고, 송설체(원나라 조맹부의 서체, 왕희지의 글씨가 주종)의 대가로도 알려져 있다.
- '''박희수'''(朴希壽)는 눌재공의 손자이다. 아버지 박민제의 둘째 아들로 진사시까지 통과한 삼촌 박민중이 후사 없이 요절하자 양자로 들어갔다. 1577년 음보로 후릉참봉이 됐다. 5촌 작은 당숙 박순이 정승이었지만 권세를 바라지 않았고 가풍이 깨끗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광주광역시에서 고경명과 의병을 모집하고 군량을 조달해 호성원종공신[84] 1등에 책록되었다. 한성부 참군, 사포서[85] 사포, 형조좌랑을 역임했다.
- '''박용주'''(朴用柱)는 1871년 광주광역시 태생이다. 1888년 무자 식년시 병과로 급제했다. 홍문관 교리 겸 지제교[86]를 역임했고, 1899년 궁내부 내 홍문관 시독에 임명되었으나 의원면본관[87]을 청하여 39세에 낙향했다.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벌어졌고 대한제국의 국권이 위태로운 때였다. 아관 파천을 겪고 수구파와 친러파가 조정을 장악한 상태였다. 이후 한일강제병합과 치욕적인 역사 속에 은거생활을 했다.
4. 본관
5. 일화
- '''오촌'''(梧村) '''박응훈'''(朴應勳: 1539~1590)은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출신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장 박이룡(朴以龍) 장군의 동생이며 효자로 널리 알려졌다. 부모 산소에서 시묘살이를 하는 동안 밤마다 호랑이가 지켜주고, 심지어 오촌공을 따뜻하게 품어주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연유로 호점산소(虎点山所)로 명명된 묘역 옆에는 현재까지도 호랑이의 무덤(虎塚)이 남아있다. 선조 34년(1601년)에 정려가 내려졌고, 현종 때 송계서원(松溪書院)에 배향되었다.[88][89]
- '''눌재'''(訥齎) '''박상'''(朴祥: 1474~1530)은 광주 송정리 절골 출신이다. 연산군이 전국에 채홍사(採紅使)를 보내 미녀를 찾던 중, 나주에 사는 우부리(牛夫里)의 딸이 간택되었다. 우부리의 딸이 연산군의 총애를 받자, 우부리는 권세를 믿고 온갖 패악과 부정부패를 저질러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했다. 심지어 지방 관리들조차 그의 눈치를 봐야 했다. 서울에서 벼슬을 하던 눌재는 전라도 도사(都事)를 자원하여 부임하자마자, 우부리가 인사를 오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곤장을 쳐서 죽였다. 우부리의 집에서는 장례를 치를 생각도 하지 않고 서울로 사람을 보내 이 사실을 알렸고, 분노한 연산군은 금부도사를 보내 사약을 내리려 했다. 한편, 눌재는 우부리의 죄상을 조정에 낱낱이 밝히고 임금에게 대죄(待罪)를 청하고자 즉시 상경을 결심했다. 나주목사에게 사표를 제출하고 전라남도 장성군의 갈재를 넘어 입암산(笠岩山) 밑 갈림길에 이르렀을 때, 들고양이 한 마리가 나타나 바짓가랑이를 물어채는 대로 따라갔다. 그 덕분에 금부도사와 길이 엇갈려 위기를 모면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중종반정(中宗反正)이 일어나 사건은 불문에 붙여졌다. 눌재는 고양이의 은혜를 잊지 않기 위해 자신의 논 수십 결을 묘답(苗畓)이라 이름 짓고, 거기서 나오는 소출을 매년 금강산 정양사에 공양했다고 한다. 이 공양은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후손들이 계속했지만,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역둔토(소유주가 불분명한 토지)로 규정하고 국유화했다. 눌재의 후손들은 대대로 고양이를 은혜로운 동물로 여겨 귀하게 여겼다고 전해진다.[88][89]
6. 가훈
7. 인구
2000년 통계청 발표에 따르면 충주 박씨는 8,559가구 총 27,486명이 있는 것으로 집계되었다.[6] 1985년 당시 지역별 인구 분포는 다음과 같다.
지역 | 인구(명) |
---|---|
서울 | 6,468 |
부산 | 731 |
대구 | 652 |
인천 | 656 |
경기 | 2,199 |
강원 | 451 |
충북 | 1,647 |
충남 | 5,091 |
전북 | 1,266 |
전남 | 3,159 |
경북 | 872 |
경남 | 384 |
제주 | 41 |
수도권을 제외하면 충남과 전남 지역이 대종이었다. 2000년에는 다음과 같이 수도권과 대전에 집중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6]
지역 | 인구(명) |
---|---|
서울 | 6,622 |
부산 | 706 |
대구 | 716 |
인천 | 1,249 |
광주 | 2,287 |
대전 | 4,320 |
울산 | 212 |
경기 | 5,011 |
강원 | 409 |
충북 | 1,564 |
충남 | 1,231 |
전북 | 1,065 |
전남 | 818 |
경북 | 870 |
경남 | 349 |
제주 | 57 |
2015년 대한민국 통계청 인구주택총조사에서는 34,226명으로 조사되었다.
참조
[1]
웹사이트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충주 박씨 성화보 편
http://www.cha.go.kr[...]
[2]
문서
밀양, 반남, 고령, 함양, 죽산, 순천, 무안, 충주 박씨 - 고려와 조선 양조를 통틀어 가장 많은 인재들을 배출한 8대 박성(朴姓)
[3]
문서
충주박씨 장원급제자 명단: 박형문(朴衡文), 박상(朴祥), 박우(朴祐), 박순(朴淳)
[4]
문서
충청도병마절도사 박형무(朴衡武),강원도 관찰사 박우(朴祐)
[5]
문서
충주 박씨 청백리 명단: 박효함(朴孝諴),박상(朴祥),박우(朴祐),박순(朴淳)
[6]
뉴스
정복규의 성씨순례 중 (67)충주 박씨 편
http://www.sjbnews.c[...]
2014-04-15
[7]
문서
장악원(掌樂院): 궁중음악 및 무용에 대한 행정,연주활동 주관 관청
[8]
문서
여마(輿馬),구목(廐牧)및 목장에 관한 일을 관장하기 위해 설치되었던 관서
[9]
뉴스
<기대승의 실천선비 정신깃든 광주 월봉서원>
https://news.naver.c[...]
2004-02-25
[10]
문서
[[근초고왕]] 5년인 [[350년]] 경에 [[백제]]로 편입. 후에 낭자성, 화성으로 명칭 변경
[11]
문서
최윤덕은 세종 묘에 배향된 관료이자 무인으로 전국 곳곳에 왜구 방비용 성을 쌓아 축성대감이란 별명으로 불렸다.
[12]
문서
현재 [[충남]] [[보령시]] 청라면 백월산 소재(所在)
[13]
웹사이트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0권 보령편 궁실 문단
http://cafe.daum.net[...]
[14]
웹사이트
무송헌집(撫松軒集)에 기재된 論朴孝諴除職仍請罷李賢老闕內考書籍及給精勤僧人度牒之命啓(1451.7.5. 掌令時 憲府聯啓) 중 발췌
http://www.ugyo.net/[...]
[15]
문서
조선시대 종이품아문(從二品衙門)으로 시정(時政)의 옳고 그름을 분별하여 밝히고, 관리들의 비행과 불법행위를 따져 살피는 동시에 어지러운 풍속을 바로잡고, 백성들이 원통하거나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이를 풀어 주며, 지위를 남용하거나 오용하는 것을 막는 등 국정 전반에 걸쳐 힘이 미치지 않는 분야가 없을 정도로 다양한 업무를 처리, 관리들의 비행에 대한 탄핵검찰권과 일반 범죄에 대한 검찰권, 인사와 법률 개편에 대한 동의권,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는 서경권(署經權)까지 가지고 있었다.
[16]
문서
[[송시열|우암 송시열]]이 박사삼(-士三)의 효행을 기리는 비문에서 박사삼의 증조부 박지(朴址)가 현감을 지냈다고 적고 있으나 임지 정보는 없었음.
[17]
뉴스
한빛신문 2011년 12월 31일 제60호 12면
http://blog.naver.co[...]
[18]
웹인용
김천문화원 김천묘지기행 7번째 이야기 '임란 의병장 학촌(鶴村) 박이룡(朴以龍)'에서 발췌
http://www.gcculture[...]
2012-12-21
[19]
문서
현재의 [[경북]] [[김천시]] 양천동 하로마을
[20]
문서
성병(聲病): 시문(詩文)의 성조(聲調)에 얽매이는 병폐
[21]
웹사이트
박사삼을 기리며 -송시열作 둘째문단
https://terms.naver.[...]
[22]
문서
[[오위|오위(五衛)]]: [[1457년]]([[조선 세조|세조 3년]])에 설치되었고, [[1566년]]([[명종 (조선)|명종 21년]])에 오위도총부로 개칭됨. 조선 초·중기에 근간을 이루었던 군사조직으로 의흥위(義興衛:中衛), 용양위(龍驤衛:左衛), 호분위(虎賁衛:右衛), 충좌위(忠佐衛:前衛), 충무위(忠武衛:後衛)를 말한다. 조선 개국 초 고려 중앙군 조직인 8위(八衛)에 태조 이성계(李成桂)의 친병(親兵)을 바탕으로 하는 의흥친군좌위(義興親軍左衛)와 의흥친군우위(義興親軍右衛)를 가설해 10위의 중앙군 조직을 갖추었다.
[23]
문서
조선 인조 때, [[이괄의 난]]을 진압한 광서(匡西) 박진영과 한자까지 이름이 같아 혼동되는 경우가 많은데 여현공과 광서공은 전혀 다른 사람이다. [[임진왜란]]과 [[이괄의 난]] 진압에 공을 세운 박진영(-震英)은 字가 광서(匡西)로 [[경남]] [[함안]] 사람이며 [[밀양 박씨]] 영동정공파 16세손이다. 보통 진무공신에 오른 [[소북|소북파]] 남이공, 유효걸과 같이 다뤄진다. 광서공은 판돈녕부사(判敦寧府事) 겸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 숭정대부(崇政大夫)에 추증(追贈)되었다. 광서공은 오위도총부란 직제에서 보듯 여현공보다 후대의 사람이다.
[24]
문서
군기시: 조선시대 정삼품아문(正三品衙門)으로 병기(兵器)의 제조를 관장. 태조때 설치
[25]
웹인용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박금(朴嶔)편
http://people.aks.ac[...]
2012-12-28
[26]
웹인용
전북 완주군 용진면 구억리 용진서원 탐방기
http://blog.daum.net[...]
2012-12-31
[27]
문서
승정원: 왕명의 출납(出納)을 맡았으며 정원(政院),후원(喉院),은대(銀臺),대언사(代言司)라고도 불렸다.
[28]
뉴스
다트뉴스24 2010년3월3일기사
http://www.dtnews24.[...]
[29]
웹사이트
조선왕조실록 영조편
http://sillok.histor[...]
[30]
문서
脚註-분무공신은 1764년(영조40년) 양무(揚武-)공신으로 개칭되었다. [[청나라]] 개국후에도 조선은 [[임진왜란]]때 [[명나라]]가 도와준 은의를 기리기 위해 [[창덕궁]] 비원에 대보단(大報壇)을 설치하고 [[홍무제|명나라 태조]]부터 마지막 황제 [[숭정제|의종]]까지 제향했다. [[영조]]는 [[숭정제|의종]]의 휘호(徽號)에 분(奮-떨칠 분)자가 들어가므로, 이를 피해 분무(奮武)에서 같은 뜻의 양(揚-날릴,떨칠 양)자로 바꿔넣고 1728년 당시의 모든 교서와 녹권등에도 글자를 고치도록 했다
[31]
웹사이트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박동형편
http://people.aks.ac[...]
[32]
문서
예장: 원래 종1품 이상의 대신이 죽을 때만 해주는 국가 장례
[33]
문서
묘조: 7대 이상의 조상과 합사할 수 있는 사당
[34]
뉴스
'공신, 그의 후손의 가격까지 보장한 특권' -2012년 7월 9일 문화일보 최영창 기자
http://www.munhwa.co[...]
[35]
문서
"분무공신 박동형집안 소장 공신문서류의 현황과 특징"
[36]
웹인용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DB 박제함 편
http://people.aks.ac[...]
2013-02-24
[37]
문서
종부시(宗薄寺): 조선시대 왕실의 계보인 선원보첩(璿源譜牒)의 편찬과 종실의 잘못을 규탄하는 임무를 관장하기 위하여 설치하였던 관서
[38]
문서
통례원(通禮院): 조선시대 국가의 의례(儀禮)를 관장하였던 관서
[39]
웹사이트
한국지명유래 충청편 중 내동(內洞 , Nae-dong, 대전광역시 서구) 행정명칭 유래 소개
https://terms.naver.[...]
[40]
문서
발영시(拔英試): 세조 12년에 한시적으로 정2품 이하의 문무관들이 치뤘던 과거시험. 여기서 뽑힌 자들에겐 자품을 한 등급 올려주고, 이후 요직에 뽑혀 중용되었다. 등준시와 더불어 관료들을 대상으로 한 시험의 원형이 되었으며, 이후 중시(重試)로 이름이 고쳐져 계속 유지됐다.
[41]
웹인용
한국역대인물 종합정보 박형무편
http://people.aks.ac[...]
2012-12-21
[42]
문서
무과 발영시(세조12년) 명단: 장원 금휘(琴徽), 남이(1441년생), 문맹손(文孟孫), 박형무
[43]
웹인용
국역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 3년7월10일자
http://www.koreanhis[...]
2017-03-29
[44]
웹인용
국역조선왕조실록 연산03년11월27(갑자)일 경상우도 병마 절도사 이거인 등이 제포의 왜인 마을의 일에 대해 보고하다
http://www.koreanhis[...]
2017-03-29
[45]
문서
부산포,제포(경남진해),염포(경남울산)
[46]
문서
사관(射官): 삼포 거주 왜인들의 비행을 감시하기 위해 배에 태워야 하는 조선하급관리
[47]
문서
"[[단경왕후|단경왕후 신씨(愼氏)]]: [[중종반정]]에 동참하지 않았던 익창부원군(益昌府院君) 신수근(愼守勤)의 딸로 후에 폐서인이 되지만 어쨌든 중종의 첫 정실이 된다."
[48]
웹인용
박형무(朴衡武)의 사위 신여필(愼汝弼)의 프로필
http://koreandb.nate[...]
2013-02-21
[49]
문서
가자(加資): 품계를 올리거나 혹은 정3품 이상의 품계 그 자체를 지칭. 이경우엔 후자
[50]
문서
중종반정은 연산군 친위세력과 반란세력이 결탁한 친위쿠데타 성격이 강했으므로 연산군 때의 인물들도 핵심 몇몇을 제외하고는 중중 때도 그 지위가 유지됐다.
[51]
웹사이트
"*출처-한국민족대백과사전]: 조선의 양반 품계는 무반이 정3품 절충장군(折衝將軍)까지였고 종2품 이상은 문신들과 함께 썼다."
https://terms.naver.[...]
[52]
문서
단서철권(丹書鐵券): 공신에게 주는 붉은 녹권
[53]
문서
인각화상(麟閣畵像): 충훈부(忠勳府)에 자신의 초상화를 거는 일. [[한무제]]가 수도 [[장안]]의 궁중전각인 기린각(麒麟閣)에 공신 11명의 초상을 그려 걸었다는 고사를 본뜸
[54]
문서
충훈부(忠勳府): 태조때까지 공신도감이었고 그 후로 충훈사(忠勳司)가 되었으나 세조때 사(司)를 부(府)로 승격 ,충훈부(忠勳府)로 개칭, 공신들과 그 자손에 관한 업무를 보는 관청
[55]
문서
승문원: 조선의 외교부. 사대교린에 관한 문서를 맡아 보던 관청. 괴원(槐院)이라고도 하며, 성균관·교서관과 함께 3관(三館)이라고도 한다.
[56]
문서
당송팔대가(唐宋八大家)인 아버지 [[소순]](蘇洵)과 [[소동파]](蘇東坡) 본인 그리고 아우 [[소철]](蘇轍)을 함께 이름
[57]
웹인용
한국매일뉴스 2011년3월2일자 기사 '뜻깊은 동국삼박(東國三朴) 흔적이 남아있는 절골'
http://www.ehonam.co[...]
2012-12-21
[58]
문서
백미(白眉): 삼국지의 [[마량]](馬良)을 일컬음
[59]
문서
국조인물고 권17 경재(卿宰) 육봉(六峰) 박우(朴祐)의 묘갈명(墓碣銘)-임억령(林億齡:1496~1568)作
[60]
문서
교서관: 경적(經籍)의 인쇄와 제사 때 쓰이는 향과 축문ㆍ인신(印信: 도장) 등을 관장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던 관서. 교서감(校書監) 또는 운각(芸閣)이라고도 한다. [[1392년]]([[조선 태조|태조 1년]])에 설치되었다. 관원은 모두 문관을 쓰며, 전자(篆字)에 익숙한 자 3인은 그 품계에 따라 겸임시켰다.
[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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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제직은 영조 때 [[속대전]]제정시 폐지됨
[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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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사(都使): 팔도(八道) 감영(監營)의 종오품 관직으로 감사(監司: 觀察使, 從二品)의 다음 관직이며 정원은 1원이다. 지방관리(地方官吏)의 불법(不法)을 규찰(糾察)하고 과시(科試)를 맡아보았다.
[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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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이 총애를 받는 후궁의 아비. 전남 나주의 천민임에도 왕의 권세를 믿고 온갖 패악을 부려 지역 민심이 어지럽고 흉흉할 정도였다. 전라도 관찰사(외직의 최고직, 각 도의 군주)조차 후환을 두려워하여 우부리의 전횡을 두고 볼 수밖에 없었다 한다.
[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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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피현: 현재 [[전라북도]] [[군산시]]
[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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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림역(烏林譯): [[전라남도]] [[나주시]] 남평 소재
[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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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의 기본 덕목인 삼강(三綱)과 오상(五常)을 말함. 삼강은 군위신강(君爲臣綱),부위자강(父爲子綱),부위부강(夫爲婦綱)임. 오상은 사람이 항상 행해야할 5가지 바른 행실. 곧 인(仁),의(儀),예(禮),지(智),신(信) 또는 아버지의 의(義), 어머니의 자(慈), 형의 우(友), 동생의 공(恭), 아들의 효(孝)를 말함. 사람이 지켜야 할 기본적인 도리.
[67]
웹사이트
민족문화대전 눌재 박상(朴祥)편
http://encykorea.aks[...]
[68]
웹사이트
한국향토문화대전 데이터베이스 박상(-祥)편
http://m.grandcultur[...]
[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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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윤(府尹): 관찰사와 동격, 부사의 상관
[71]
웹사이트
국조인물고 박개(朴漑)편
https://terms.naver.[...]
[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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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의 명을 소홀히 하지 않고, 부모가 싫어하는 일은 하지 않으며, 아침저녁에는 심하게 앓을 때만 아니라면 부모의 잠자리를 보살피고 안부를 물어야 한다.
[73]
시
이쁜 배로 흰 달을 싣고보니 (裝舟載素月) 어림잡아도 값이 황금은 우습겠네 (擬價輕黃金). 관나루 따위에 배를 매러가지 않으니 (不向官津繫) 평생이 신선의 마음이로군 (平生滄海心)
[74]
인물소개
중국 동진(東晉) 목제(穆帝)때의 명재상이자 당대의 문화인, 풍류인이며 인기인
[75]
관직
고려, 조선시대 국왕의 학문 지도와 치도 강론을 위하여 설치한 경연의 관직. 학문과 인품이 탁월한 문관으로서 겸직시키는 것이 보통이었다. 경연관은 왕조시대에 가장 명예로운 벼슬로서 여러 가지 특별 대우를 받는 청화직(淸華職)이었다.
[76]
용어
제수: 과거를 통하지 않고 왕명으로 벼슬에 오르는 일
[77]
시
지루하게 요깟 병에 약이 차도가 없네 (支離一疾差無藥) 돌아가 씻기에는 저세상 샘 맑은 물이 너무 차갑겠구나 (歸濯靈泉玉溜寒). 그런고로 이제 내 털과 뼈를 새롭게 바꾸어서 (從此便敎毛骨改) 푸른 구름 하늘 밖으로 봉황의 날개로 날겠노라 (碧雲天外駕翔鸞)
[78]
웹사이트
민족문화대백과사전 박순(朴淳)편
http://encykorea.aks[...]
[79]
용어
기고학황(氣高學荒): 기만 세고 학문이 거칠다는 뜻
[80]
역사적 사실
정개청은 스승을 배신했다는 사실 하나를 꼬투리잡아 조선 시대가 끝난 오늘날까지 패륜아 이미지가 뒤집어 씌어졌다. 그는 [[정여립|정여립(鄭汝立)]]과 손잡고, 유교를 모든 백성들의 삶에 행동강령으로 뿌리내릴 수 있도록 [[향약 운동]] 보급에 앞장섰다. 뛰어난 시인이자 탁월한 학자이며 리더였던 정개청은 [[송강 정철]]이 일으킨 [[기축옥사]]로 인해 심한 고문을 받고 귀양 도중 죽었다. 그의 출신은 지방 향리의 아들이었음이 팩트인데도 천민의 자식이었다는 허위 사실까지 사료 곳곳에 남아있을 정도로 이후 서인, 그것도 노론 중심으로 정국을 주도되어온 조선의 사상사(思想史)적 흐름에서 배제됐다.
[81]
용어
저울로 물건을 다는 것과 같이 글을 평가하는 자리라는 뜻에서, '대제학'을 달리 이르던 말.
[82]
역사적 사실
우암 송시열은 절대 정통 주자학을 늘 강조했고 철두철미하게 생각했다. 사암은 그런 송시열에게 존경할만한 대선배였다. 우암은 충주 박씨들의 비문(碑文)들이나 족보에 글을 굉장히 많이 써주었고 또한 그의 문인에 충주 박씨들이 많다. 그리고 충주 박씨에서 [[조선 인조]], [[조선 효종|효종]] 이후 글을 읽었다 하는 이들은 대개 기호학파 노론(老論)이다.
[83]
역사적 사실
대표적으로 [[허엽]]같은 이들은 노골적으로 이이와 성혼에게 증오를 드러내고 공격했다. 서화담의 문인들은 대부분이 동인이 되었고 그나마도 북인으로 살았기 때문에 광해군의 폐위 이후 몰락한 그들의 위치 때문에 서화담의 학문이나 작품은 빛을 보지 못하였고 아울러 화담이 조선 사상사에 빛나는 독자적 거유(巨儒)임에도 [[문묘]](文廟)에 제향되지 못했다. 표면상의 이유는 그의 학문에 '도학(道學-노장사상)'이 포함돼 있다는 거였다.
[84]
역사적 사실
정(正)공신은 아니지만 나라에서 그 자제나 왕을 호종한 사람들에게 널리 주던 훈작으로, 원종공신이라도 1등에게는 ① 한 자급(資級: 벼슬아치의 품위의 등급)을 더 올려주고, ② 아들과 손자에게 음서의 혜택을 부여하며, ③ 후세에까지 유죄(宥罪: 죄를 지었을 때 너그러이 용서해 주는 것)하고, ④ 부모에게 봉작하고, ⑤ 아들과 손자 중에서 자원에 따라 한 사람에게 산관(散官) 한 자급을 더해 주었다.
[85]
관직
왕실 소유의 과일과 채소를 관장
[86]
관직
지제교(知製敎): 교서(敎書),교지(敎旨)등의 틀을 잡아 왕에게 올렸던 관직으로 홍문관(弘文館)의 부제학(副提學) 이하 부수찬(副修贊) 까지의 관원 13인 모두가 지제교를 겸하였으며, 별도로 6품 이상의 문관을 선정하여 지제교를 겸임시킴. 18세기 후반에는 홍문관 관원으로 지제교를 겸할 경우 내지제교, 대제학(大提學)이 이조 판서(吏曹判書)와 상의하여 6품 이상 문관으로 지제교를 겸임시킨 경우 외지제교라 칭하고 규장각(奎章閣)의 직제학 이하 관원은 모두 외지제교를 겸임하였음.
[87]
웹인용
'[[1899년]](대한 광무 3년)12월20일수요일 대한제국 서임사령(敍任及辭令)
https://web.archive.[...]
2012-12-29
[88]
뉴스
조선일보 2011년10월31일 칼럼 '이종범 교수의 호남인물열전 16번 김개(金漑)편' 발췌
http://news.chosun.c[...]
2011-10-31
[89]
역사적 사실
반정 공신에 책록된 사항도 없고 공신을 정할 때 거절한 기록도 없는 것으로 보아 반정 세력과 도모한 일은 아닌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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